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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날 공휴일 역사 – 1950년 지정, 1976년 국군의 날로 바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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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유엔의 날은 지금은 달력에 검은 글씨로 찍히지만, 한때는 법령에 이름이 오른 공휴일이었습니다. 이 글은 2026년 10월 기준으로 국가법령정보센터 개정문, 국가기록원 자료, 유엔 문서를 대조해 「유엔의 날 공휴일」이 언제 생기고 빠졌는지 정리한 기록입니다. 올해 10월 24일은 토요일이고, 유엔헌장 발효 8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현행 조문이 아니라 날짜 자체의 이력을 따라갑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1950년 전쟁 중의 대통령령, 1976년 대통령령 제8235호까지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1. 1945년 10월 24일, 헌장이 발효된 날 2. 1950년 9월 18일, 전쟁 중에 공휴일이 되다 3. 1976년 9월 3일, 국군의 날과 자리를 바꾸다 4. 흔한 오해 짚기 – 한국의 유엔 가입 기념일이 아니다 5. 10월 공휴일 숫자로 본 1976년과 1990년 6. 2026년 현재 유엔의 날의 법적 위치 자주 묻는 질문 1. 1945년 10월 24일, 헌장이 발효된 날 유엔헌장은 1945년 6월 26일, 50개국 대표가 모인 샌프란시스코 회의 마지막 날에 서명됐습니다. 그러나 서명만으로 유엔이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헌장 제110조 제3항은 중화민국, 프랑스, 소련, 영국, 미국 다섯 나라와 나머지 서명국 과반수의 비준서가 기탁되어야 헌장이 발효된다고 정했습니다. 이 조건이 채워진 날이 1945년 10월 24일이고, 유엔은 이날을 공식 출범일로 봅니다. 유엔총회는 1947년 10월 31일 결의 168(II)로 이날을 헌장 발효 기념일로 선언하고 유엔의 목표와 성과를 알리는 날로 삼았습니다. 즉 유엔의 날은 창설 회의일이나 서명일이 아니라 「발효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2. 1950년 9월 18일, 전쟁 중에 공휴일이 되다 대한민국의 공휴일은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제124호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처음 정해졌습니다. 이 제정판에는 10월 24일이 없었습니다. 국제연합일이 들어간 것은...

제적등본 인터넷 발급 – 본인 것만 무료, 할아버지 것은 왜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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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기준으로 제적등본은 여전히 살아 있는 서류입니다. 상속 절차를 밟거나 보험금 수급권자를 확인할 때, 가족관계증명서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이름이 제적등본에는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008년에 호주제가 폐지됐는데도 이 장부를 떼러 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막상 발급받으려 하면 검색 결과가 서로 다른 말을 합니다. 수수료가 무료라는 글도 있고 1,000원이라는 글도 있으며, 인터넷으로 할아버지 제적등본을 뗐다는 후기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정부24 민원안내와 대법원 전자가족관계등록시스템의 공식 안내에 적힌 기준만으로, 어디까지가 인터넷으로 되고 어디부터는 창구로 가야 하는지를 정리했습니다. 목차 1. 제적부는 호적제도가 남긴 장부다 2. 2007년 12월 31일이 기준선이다 3. 인터넷 발급은 「제적부에 기록된 본인」만 된다 4. 수수료가 글마다 다른 이유 5. 위임 없이 창구에서 뗄 수 있는 8가지 경우 6. 등본과 초본은 무엇이 다른가 자주 묻는 질문 1. 제적부는 호적제도가 남긴 장부다 대법원 전자가족관계등록시스템은 제적부를 「종전 호적제도 하에서의 호적부로부터 분리하여 편철·보존하는 장부」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제적이란 호주승계, 무후, 그 밖의 사유로 호주와 가족이 모두 제적되거나 말소된 호적을 말합니다. 즉 제적부는 새로 만든 서류가 아니라, 호적제도가 돌아가던 시절에 이미 닫힌 호적을 따로 모아 둔 기록입니다. 호적의 주인이 사망하거나 대가 끊기면 그 호적은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제적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닫힌 장부가 지금도 상속과 신분 확인의 근거로 쓰이고 있습니다. 기록 형태도 한 가지가 아닙니다. 같은 안내문에 따르면 2003년 10월 20일부터 호적사무를 원칙적으로 정보처리시스템으로 처리하게 되면서 전산제적부로 보관·관리하게 됐습니다. 그 이전의 기록과 이후의 기록이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다는 ...

제헌절 공휴일 – 7월 17일이 다시 쉬는 날이 된 법 조문과 국경일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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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이 다시 쉬는 날이 됐다는 이야기는 많이 돌았는데, 정작 어느 법의 어느 조문이 바뀌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를 설명하는 글은 드물다. 2026년 9월 기준으로 국가법령정보센터에 올라 있는 현행 법령을 직접 펼쳐 확인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문 하나가 나열 방식에서 지목 방식으로 바뀌면서 제헌절이 자동으로 따라 들어온 구조다. 이 글은 제헌절 하루만 다루지 않는다. 같은 개정에서 함께 바뀐 것들과, 지금 우리나라 공휴일이 법적으로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조문 순서대로 정리한다. 목차 제헌절 공휴일의 근거는 공휴일법 제2조 제1호다 옛 조문은 국경일을 하나하나 적는 방식이었다 국경일 5개와 날짜 같은 조문에 노동절이 들어와 있다 현행 공휴일 전체 목록 대체공휴일은 법이 아니라 대통령령이 정한다 7월 17일과 7월 12일 — 헌법 전문이 말하는 날짜 자주 묻는 질문 제헌절 공휴일의 근거는 공휴일법 제2조 제1호다 우리나라의 공휴일을 정하는 법은 「공휴일에 관한 법률」 , 줄여서 공휴일법이다. 국가법령정보센터 기준 현행본은 [시행 2026. 5. 11.] [법률 제21338호, 2026. 2. 10., 일부개정] 이고, 소관 부처는 인사혁신처 복무과와 고용노동부 임금근로시간과다. 제1조는 목적을 이렇게 적는다. "이 법은 국가의 공휴일을 지정함으로써 사회 각 분야의 공휴일 운영에 통일성을 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조문인 제2조가 공휴일을 열거한다. 이 제2조에는 <개정 2026. 2. 10., 2026. 4. 9.> 라는 표시가 붙어 있다. 한 해에 두 번 손을 댔다는 뜻이다. 그 제2조의 첫 번째 호가 이것이다. 공휴일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 1.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른 국경일 짧다. 그런데 이 한 줄이 제헌절 문제를 통째로 해결한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정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일정 – 80회 접수 9월 15일 시작, 지역별 단계 접수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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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10일 기준으로 다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제80회, 시험일은 2026년 10월 17일 토요일 입니다. 원서접수는 9월 15일 화요일 오전 10시에 열립니다. 그런데 이 날짜만 알고 접수창을 열면 낭패를 봅니다. 제80회 접수는 전국이 동시에 열리지 않고 지역별로 시간을 나눠 단계적으로 개방 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사는 응시자가 9월 15일 오전 10시에 접속해도 그날은 접수를 할 수 없습니다. 서울·강원·제주는 9월 18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입니다. 이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공식 안내(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한 내용만으로 제80회 일정, 지역별 접수 시간표, 급수와 합격 점수, 시험 당일 시간표, 신분증 규정, 환불 기한을 순서대로 정리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값은 적지 않았고, 어디까지가 공식 안내인지도 함께 적었습니다. 목차 제80회 일정 — 접수 9월 15일, 시험 10월 17일 원서접수가 지역별로 단계 개방된다 2026년 78·80·81회는 심화만 시행된다 급수와 합격 점수 — 심화 1~3급, 기본 4~6급 시험 당일 시간표와 준비물 신분증 규정 — 학생증과 패스앱은 인정되지 않는다 취소·환불 기한과 수험표 출력일 인증서 유효기간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정하지 않는다 자주 묻는 질문 제80회 일정 — 접수 9월 15일, 시험 10월 17일 제8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2026년 10월 17일 토요일에 시행됩니다. 원서접수는 9월 15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9월 22일 화요일 오후 5시까지이고, 합격자 발표는 10월 30일 금요일입니다. 접수 마감 뒤에도 좌석이 남으면 9월 29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10월 2일 금요일 오후 5시까지 취소좌석 접수가 한 번 더 열립니다. 2026년에는 시험이 다섯 번 있습니다. 예년보다 한 회차가 많은데, 국사편찬위원회는 그 이유를 공식 일정 안내에 그대로 밝...

흑사병 1347년 - 카파에서 시칠리아까지, 유럽을 바꾼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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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흑사병은 1347년부터 1352년까지 유럽을 휩쓴 전염병입니다. 원인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라는 세균이었고, 피해 지역에서는 인구의 30~50% 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글은 병이 어떻게 유럽에 들어왔고, 왜 그렇게 빨리 퍼졌으며, 그 뒤 무엇이 달라졌는지 를 정리한 것입니다. 추정치는 추정이라고 밝혔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은 넣지 않았습니다. 목차 카파 공성전 — 병이 배에 실린 순간 1347년, 시칠리아에 닿다 무엇이 사람을 죽였나 세 가지 병형과 치사율 숫자로 본 피해 살아남은 자들의 세계가 달라졌다 자주 묻는 질문 카파 공성전 — 병이 배에 실린 순간 흑사병이 유럽으로 건너온 경로는 한 차례의 공성전과 이어져 있습니다.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카파(Caffa) 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도시를 포위한 타타르·몽골군 진영에 병이 돌았습니다. 그들은 감염된 시체를 투석기로 성 안에 던져 넣었다 고 전해집니다. 성 안에 있던 제노바 상인들 이 이 과정에서 감염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상인들은 그대로 남지 않고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병이 사람을 따라 이동한 것이 아니라, 교역로를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중세 유럽과 아시아를 잇던 교역망이 어떤 구조였는지는 실크로드와 해상 교역로를 다룬 글 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 길이 물자와 지식만 옮긴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이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1347년, 시칠리아에 닿다 카파를 떠난 제노바 곡물선 네 척 이 1347년 시칠리아에 도착합니다. 이것이 유럽 대륙에서 흑사병이 시작된 지점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항구는 병이 퍼지기에 가장 나쁜 조건을 갖춘 장소였습니다. 사람과 화물과 쥐가 한자리에 모이고, 그 배가 다시 다음 항구로 떠납니다. 육로였다면 며칠이 걸렸을 거리를 배는 한 번...

손기정 금메달 90주년 – 일장기 말소 사건과 아직 일본으로 남아 있는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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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마라톤 우승자가 들어옵니다. 기록은 2시간 29분 19.2초 ,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전광판에 오른 이름은 "KITEI SON" , 국적은 일본 이었습니다. 그 선수의 본래 이름은 손기정이었습니다. 2026년 8월, 그 금메달이 9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IOC 공식 기록의 국적은 지금도 일본입니다. 이 글은 그 9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아직 고쳐지지 않았는지를 사실 관계 위주로 정리합니다. 모든 날짜와 수치는 2026년 8월 28일 기준 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올림피디아 기록, 최근 보도에서 확인했습니다. 목차 1936년 8월 9일, 시상대에 오른 두 조선인 사진 한 장 – 일장기 말소 사건의 실제 순서 279일 정간, 그리고 폐간 왜 IOC 기록은 아직 일본인가 90주년, 2026년에 실제로 벌어지는 일 자주 묻는 질문 1936년 8월 9일, 시상대에 오른 두 조선인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는 27개국 56명이 출발해 42명이 완주했습니다. 시상대는 이렇게 채워졌습니다. 순위 기록상 이름 · 국적 기록 금 손기정 (일본) 2:29:19.2 은 어니 하퍼 (영국) 2:31:23.2 동 남승룡 (일본) 2:31:42.0 출처: Olympedia 1936 베를린 남자 마라톤 결과, 2026년 8월 28일 확인 시상대 세 자리 중 두 자리가 조선인 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일본 국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경기는 8월 9일에 열렸는데, 정확히 56년 뒤 같은 날짜인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에서 황영조가 마라톤 금메달을 땄습니다. 당시 손기정은 양정고등보통학교 5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자기 나라 이름을 달 수 없는 대회에서 세...

1950년 유엔군의 전술 혁신 – 인천상륙작전이 바꾼 전쟁의 작전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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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은 단순한 ‘한 번의 대담한 상륙’으로 끝난 이벤트가 아니라, 유엔군이 전쟁을 바라보는 작전 개념 자체를 바꾸어 놓은 전술 실험장이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버티던 전선은, 인천이라는 협소하고 조수 간만이 심한 항구를 활용한 우회 상륙으로 순식간에 주도권을 되찾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전투 그 자체의 스토리를 넘어, 인천상륙작전이 어떤 전술적·운용 개념의 혁신을 낳았는지, 그리고 이후 현대 전쟁사에 어떤 기준을 남겼는지 수익형 블로그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목차 1. 인천상륙작전 전, 전쟁은 어떻게 싸우고 있었나 ⚙️ 2. 맥아더의 역발상 – ‘불가능한 상륙’을 선택한 이유 🧠 3. 인천이라는 ‘악조건 해역’이 만든 전술 혁신 실험실 🌊 4. 합동·입체 작전의 교과서 – 해·공·육이 한 몸처럼 🚢 5. 심리전·정보전의 결합, 전황을 뒤집다 🛰️ 6. 현대 전쟁에 남은 인천상륙작전의 전략적 유산 📚 7. 결론 – 한 번의 상륙이 바꾼 20세기 전쟁의 규칙 8. 자주 묻는 질문(FAQ) 아테네 시민권과 전쟁·민주주의 알아보기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황 변화 총정리 알아보기 1. 인천상륙작전 전, 전쟁은 어떻게 싸우고 있었나 ⚙️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20세기 전쟁 개념은, 여전히 제2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긴 전선이 서로 맞닿고, 전차와 보병, 포병이 넓은 전장을 따라 전선을 밀고 당기는 선형(線型) 전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 역시 북한군의 남침은 이러한 패턴을 따르며 한반도를 남쪽 끝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유엔군 역시 초반에는 전선 유지와 보급선 확보에 초점을 둔 전통적 작전 개념에 묶여 있었습니다. 제한된 병력과 장비를 넓은 전선에 나누어 배치했고,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가 작전의 핵심 질문이 될 정도였습니다. 전...